삶 자체가 효과적인 치료
곤충학자가 고치 속에서 나비들이 나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구멍이 너무 좁아서 나비들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길래 가위로 구멍을 약간 넓혀 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비는 쉽게 구멍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좁은 구멍에서 나온 나비는 이미 날개를 펴서 날고 있었는데, 넓혀준 구멍에서 나온 나비는 도무지 날지를 못했습니다. 나비는 고치 안에 있을 때 모든 영양분은 어깨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 이 영양분이 좁은 구멍을 빠져 나올 때에 계속 뒤쪽으로 밀려서 날개 쪽으로 골고루 퍼지게 되고 날개에 힘이 생겨 힘차게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넓은 구멍으로 나온 나비는 영양분이 그대로 어깨에 있어서 날개가 힘이 없고 앞쪽이 무겁기 때문에 날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방심’에 관하여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롬7:15-24) 말에 씨가 있다는 말처럼 우리가 한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함으로 후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대가 되면 10대 때 했어야 할 일들이 후회합니다. 30대가 되면 20대 때 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40대도 30대를 생각하고, 50대도 40대를 생각합니다. 60대 때에도 내가 50만 되었어도 합니다. 70대는 60대를 생각하겠지요.
미국에서 의사였고, 시인인 마종기 시인은 임종 직전의 환자들 1,000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했는데 1,000명이 천 가지 답을 했다고 합니다. 마종기 시인이 그 대답을 3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첫 번째는 베풀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풀고 싶습니다. 화해입니다. 세 번째는 하고 싶었던 것을 한 번은 해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한 번이기 때문에 후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고 죽을 때 멋있게 죽은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나이가 들면 ‘폐경’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폐경’이라고 부르지 말고 ‘완경’이라고 부르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멋진 말 같습니다. 쓸모없어졌다는 ‘폐경’보다는 이제 여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완경’을 했다는 말이 멋집니다. 죽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이 끝났다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출발입니다.
죽음을 선고 받았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2만 가지 사례를 연구한 죽음의 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은 한 집에서 한 집으로 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애자들은 온전함을 느끼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터널이나 산길을 간 후에 빛에 에워싸게 되는 데 태어난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삶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셋째는 인생의 가장 최악의 적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좋지 않았던 사건들이야 말로 인간이면 배워야 할 이해, 사랑 속에서 우리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존재했던 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에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세상에 왔고, 사랑을 베풀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가끔 우리들은 무리한 약속을 했던 일, 무계획적인 소비 습관, 신중히 생각할 것을 성급하게 결정한 일, 들을 생각해 보며 후회하기도 합니다. 다시 그 때 일로 돌이켜 보면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이 안정되고 순탄하게 풀리는 그 때에 우리 삶 속으로 부정적인 것을 끌어 들입니다. 마치 우리 삶 속에 균형 있고 조화롭게 되는 때를 오히려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어진 경계선을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 마침내 성과를 거두었다.’ 라고 기분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현상 유지에 불만을 가지게 되고, 안정된 삶을 고의적으로 비틀면서 경계선 너머의 무엇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20세기의 선구자적인 정신분석 학자 카렌 호나이(1885-1952)는 다행스럽게도 ‘정신분석은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 삶 자체가 늘 매우 효과적인 치료법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경계선인 말씀의 씨앗을 주셨습니다. 그 씨앗을 30배, 60배, 100배로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가요? 상황직면하기 입니다. 우리 삶 속에 갑작스럽고 비합리적인 변화를 끌어들이는 거친 충동의 뿌리들을 고찰할 때,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것보다 우리에게 개인적인 상황에 보다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만날 때, 인생을 사는 동안 필요한 용기가 있습니다. 꿈을 꾸고 현실을 직시하여 두려움이나 고난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용기입니다. 고치가 작은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이 힘들어 보이더라도 그것을 통과해야 어깨의 영양분이 날개 쪽으로 퍼져서 나비처럼 날 수 있는 것처럼 상황을 통해서 배우고 성장해야합니다. 상처를 감수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말씀과 진리로 부르심을 받아 행동에 옮기는 치료법입니다.